[공연] 1/23 Grimes Review: 선명한 팝스타

(늦은 리뷰지만..)

Grimes(이하 “그라임스”)의 공연은 흐릿함에서 선명함으로 향하는 과정 같았다. 그라임스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리게 된 앨범 “Visions”의 대표적인 트랙, “Genesis”나 “Oblivion”부터 시작해서 이번 “Art Angels” 앨범의 “Flesh without blood”나  “Realiti”까지. 그라임스의 음악과 뮤직비디오는 전반적으로 흐릿한 화면처럼 공중 어디엔가 떠다니는, 정체를 규정할 수 없는 그 어떤 인상을 청취자에게(시청자에게) 가져다준다.

그런 의미에서 Realiti의 사운드와 뮤직비디오는 그 흐릿함의 절정을 선보이는 트랙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Realiti는 과거의 흐릿함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Obilivion” 뮤직비디오에서 단순히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노래를 부르던 모습과는 다르게, Realiti에서 그라임스는 몽롱한 사운드와 화면에 맞추어 매우 선명한 춤을 춘다. 싱가폴을 배경으로 필터가 걸린 화면 안에서 자유롭게 춤을 추는 그라임스의 모습은 경기장에서, 락커룸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부드럽게 리듬을 타던 그것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그 느낌은 매우 이질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데 어쩌면 이 모습이 그라임스 자신이 가진 흐릿한 감성과 선명한 표현을 가장 잘 조화시킨 모습이 아닐까 싶다.

 

흐릿함과 선명함의 조화를 넘어서, 공연 이틀전에 공개된 Kill V. Maim의 뮤직비디오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선명함을 가장 극대화 시킨 곡이었고 당일의 공연 역시 이 선명함을 보여주는 것에 가장 초점이 맞춰져 있어 보였다. YG의 대표적인 그룹인 빅뱅이나 2NE1이 연상되는 이 뮤직비디오는 그라임스의 커리어에 큰 터닝 포인트가 될만한 노래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라임스 스스로도 공연 중에 멘트를 통해 이번 앨범에서 이 노래를 많이 아끼며, 자신이 만들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하였으니말이다.

 

Flesh without blood와 Realiti로 시작하여 Kill V.Maim으로 끝난 이 날의 공연은 그녀가 얼마나 선명한 팝스타인지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팬들은 그녀의 춤과 노래에 환호했고, (여느 한국의 공연과 마찬가지로) 떼창이 이어졌으며 총 13곡의 곡을 쉴새없이 관객들에게 선사했다. 무대 앞을 종횡무진하는 두명의 댄서는 곡에 맞추어 춤을 이어갔고, 그라임스는 때로는 춤을 추고 기타를 치면서 관객을 사로잡았다. 공연장을 가득 메운(식상한 표현이지만 정말 가득 메웠다) 관객들은 그라임스의 말과 노래, 춤에 반응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녀와 관객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가 정말 팝스타가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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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임스의 팬들’에게 이날의 공연은 정말 선명하고 기억에 남을만한 공연이었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일반적인 관객들에게도 이날의 공연이 선명하고 기억에서 잊지 못할 공연이었을지는 약간의 의문이 든다.

그라임스의 최근 음악적 흐름이 보다 선명한 표현으로 나아가고 있는 느낌과는 다르게 공연은 전반적으로 선명하지 못했다. 무대의 조명은 그라임스가 보여주고자 하는 느낌과는 다르게 흐릿하고 불투명했고, 지속적으로 분출되는 스모크는 그 불투명함을 배가시켰다. HANA의 오프닝 무대에는 그 흐릿한 느낌이 잘 어울렸지만 그라임스의 무대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만약 그라임스의 이번 공연이 Art Angels 앨범 투어가 아니었다면 이 불투명함이 잘 어울렸겠지만, 보다 선명한 연출이 필요한 순간임에도 무대에 계속해서 흐르는 흐릿한 느낌은 계속해서 위화감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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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 역시 이런 느낌에 일조했다. 대부분의 곡들이 킥드럼과 베이스의 뭉툭한 사운드가 강조되었는데, 이는 굉장히 단조롭고 지루함을 야기했다. 보통 관객들에게 사운드적 몰입감을 제공하는 가장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방법은 저음 부분을 부스팅해서 음압을 높이고 그 음압을 관객에게 뿌리면서 그들이 그 음압때문에 사운드가 압도적이다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일반적인 클럽 EDM공연에서 이런 사운드가 나왔다면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겠지만 그라임스의 공연에는 이 방법이 먹히질 않았다.

이날의 공연에서 Realiti 와 Kill V. Maim이 가장 대표적으로 이 전략이 실패한 곡이었다. Realiti의 경우 앨범 수록 버전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킥과 스네어가 매우 단조롭게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드럼이나 여러 소리가 좌우로 벌어지면서 사운드적 디테일을 제공하고, 부분부분의 작은 신디사이저 소리나 효과음 등의 디테일한 소리들이 청자를 자극하면서 그 특유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하지만 이 날의 라이브에서는 그 모든 디테일들이 느껴지지 않고 저음만이 강조되다보니 단순하고 지루한 곡 구성이 이어졌다.

Kill V. Maim 역시 굉장히 빠르고 신나는 킬링트랙이지만 의외로 드럼 비트는 단순하다. 킥과 스네어 드럼이 번갈아가면서 반복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비트의 디테일에서 오는 느낌보다는 훅 부분에서 그라임스의 콧소리(?)가 느껴지는 인상적인 톤과 전반적인 사운드가 조화되어서 청자에게 주는 느낌이 크다. 하지만, 이날의 공연에서는 이 곡 역시 다른 부분이 모두 거세되고 드럼 소리만 강조되어서 단순하고 임팩트 없게 느껴졌다.

셋리스트 중에 Ave Maria는 가장 맥빠지는 순간이었는데, 공연 후반부에 해당 곡을 꼭 넣어서 공연의 맥을 완전히 풀어버릴 필요가 있었는지는 정말 의문이 든다. 그라임스 본인이 (흐름을 깨는) 곡을 완벽히 맞추지 못해서 마지막에 Oh shit. 을 외치며 다음 곡으로 넘어감에 따라 더 맥이 빠진 것은 여러 의미에서 기억에 남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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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임스의 앨범을 듣고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키워갔던 기대감이 너무나 컸던 탓일지, 이 날의 공연은 충분한 만족감을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높은 기대감을 제거하고 본다면 그라임스의 무대는 그녀가 가진 아티스트로서의 잠재력과 대중성, 그리고 더 나아가서 팝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을만한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준 공연이었다. 소소한 아쉬움이 있었던 이번 공연은 뒤로하고 보다 몰입도 있고 선명한 무대로 다시 한번 그라임스를 볼 수 있길 기대해본다.  (사실 이 마무리는 너무 오피셜하고 재미없는 맺음이다. 원랜 다른데 올리려고 이렇게 마무리했다.)

솔직히 이야기 하자면 이날의 공연은 ‘그라임스를 실제로 보았다.’ 라는 것 외에는 큰 가치가 없는 공연이었다. 팬심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사로잡기에는 전반적으로 부족함이 많았다. 그게 아티스트의 탓인지 공연장의 사운드 엔지니어 탓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전적으로 그 누구의 탓만은 아니고 복합적인 문제일 것이다. 하나 확실한 것은, 그라임스가 보다 선명한 음악을 들려주는 방향으로 자신의 음악적 방향을 바꾸어 간다면, 무대에서도 보다 선명함을 보여주고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좀 더 고민해봐야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겨울에 Yes24Muv홀을 공연장으로 선택할 때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공연기획자들은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락커룸과 출구의 동선이 정말로 거지같아서 락커룸을 들어가기 위해 수십분을 무법지대에서 이리저리 휩쓸려다닌 것은 정말 최악의 경험이었다.

사진은 모두 fakevirgin의 공식 포토.

(링크: https://kr.pinterest.com/fakevirgin/grimes-1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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